시간을 달리는 기자 ‘시간을 달리는 소녀’란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 마코토는 일반 사람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다. 바로 타임리프(time leap)를 할 수 있는 능력이다. 타임리프란 시간을 과거로 돌린다는 뜻이다. 되돌린다는 뜻의 영어단어 ‘replay’와 시간을 의미하는 ‘time'을 합친 말이라고 한다. 요새 시간이 참 잘 간다. 정신없이 신문을 뒤지고, 기사를 쓰다 보면 어느새 4시 30분이다. 내일 쓸 발제를 찾느라 신문을 뒤지고, 잘 돌아가지도 않는 짱구를 돌려가며 혼자 버둥대다 보면 시침은 이미 9시를 가리키고 있다. 돌아가는 지하철 안. 잠에서 깨어난 지 14시간 만에 생각한다.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흘러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럴 때면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
숨기려는 자 혹은 밝히려는 자 취재하기 위해 전화를 돌린다. 수화기 너머 누군가가 전화를 받는다. “안녕하세요. 에너지경제신문에 송진우 기자라고 합니다.”라고 운을 뗀다. 전화한 이유를 간단히 밝힌다. 수신자는 가만히 송신자의 문의 사항을 듣는다. 말을 끝마친 뒤, 잠깐의 정적. 수화기 너머 누군가가 둘 중 하나로 변하는 시간이다. 숨기려는 자 혹은 밝히려는 자로. 지금부터 딱 10일 뒤, 수습 딱지를 뗀다. 기자 인생으로 치자면 아직 걸음마도 떼지 않은 단계지만, 이제 전화를 걸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상대방이 반가워할 것인지 꺼림칙해하며 답변을 얼버무릴 것인지. 가령 신제품 출시나 사업 매각 건에 대해서 물으면 홍보팀에서는 이미 방어하는 자세를 취한 채 답변을 내놓는다. “사내 업무 기밀유지를 위..
속보전이란 걸 실감한 하루 아직도 생생하다. 7월 7일 삼성전자와 LG전자 잠정실적 발표날이.기자실에 도착했는데 분위기가 평상시와 달랐다. 아침 시간이라고 느긋하게 휴게실에서 신문을 훑는 사람도 한 명 없었다. 드문드문했던 삼성전자 기자실이 이전과 달리 붐볐고, 그 가운데서도 인사를 나누거나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이 하나 없었다. 다들 저마다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기에 바빴다. 마치 화라도 난 것처럼 노트북을 쏘아보고 있었다. 8시 30분. 삼성전자의 잠정실적 발표 시간이 닥쳤다. 연신 메일함의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 F5를 연타하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기자실 내부가 온통 마우스로 클릭하는 소리와 노트북 키패드 소리로 가득 찼다. 하지만 아무리 눌러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분명 어..
동기사랑 나라사랑 실로 오랜만에 동기들 얼굴을 봤다. 홍보국장님이 다 같이 모여 연극 한 번 보라고 초대장을 주신 덕분이었다. ‘기린의 뿔’이란 연극이었는데, 숙종 제위 당시 서포 김만중과 장희빈 간 갈등과 다툼을 주된 내용으로 다뤘다. 김만중은 유배 생활 중 한글소설 ‘사씨남정기’를 저술해 숙종의 잘못과 왕실 내부 처첩 간 갈등을 만천하에 고했다. 공연이 끝난 뒤 우린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맥주를 앞에 두고 그간 나누지 못한 얘기들과 고민을 풀어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며 지내다시피 한 동기들이었는데, 이번주에는 한 번도 제대로 보질 못했다. 그래서인지 여간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업무 시간에는 그리도 가지 않던 시간이 도대체 왜 술자리에서만 쏜살같이 가버리는지 도통 이유를..
안녕하세요.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2일 GS건설이 경기 안산시 사동에 ‘그랑시티자이 2차’ 견본주택을 열었다. 세간에 떠도는 ‘부동산 경기 불황설’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방문객이 견본주택 현장을 찾았다. 갓 결혼한 젊은 신혼부부부터 황혼의 노년을 준비하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모델하우스 현장에는 첫날부터 견본주택 유니트를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렸던 터라 관람을 위해선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쉽게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궁금했다. 묻고 싶었다. 무슨 연유로 이곳까지 찾아왔는지 그네들의 속사정이 궁금했다. 유니트 전시관에서 유독 주방 내부 이곳저곳 세심히 둘러보던 젊은 커플에게는 “뭘 그렇게 보고 있으세요?”라고, 건물 조감도를 ..
이름을 알면 이웃, 색깔을 알면 친구, 모양까지 알면 연인이 되는 비밀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모양을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 아, 이것은 비밀 시 전개에 맞춰보자면 나와 이 회사는 이제 막 이름을 알고 난 사이다. 통성명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웃이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처음이 힘들 듯, 그 이름에 익숙해지기가 꽤 힘이 들었다. 5월 26일 저녁. 첫 출근한 날로부터 꼬박 4일이 흐른 지금. 돌이켜보면 4일 중 이틀은 머리가. 나머지 이틀은 몸이 아팠다. 취업계를 인정해줄 수 없다는 교수님의 단언은 칼 같았다. 최근 참석한 교무회의에서 수업에 참석하지 않은 학생의 출석을 교수 재량으로 인정해주는 행위..
내 노력이 적게 느껴져 도리어 그들에게 미안해질 때 한식 시험장이었다. 과제는 생선전. 동태 한 마리가 수험자들에게 배부됐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무섭게, 전(全)테이블에서 일사불란한 손놀림이 시작됐다. 나 역시 동태를 씻어 적당한 크기로 손질했다. 적당량의 밀가루, 풀어둔 달걀도 알맞은 크기의 접시에 담았다. 풀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올려둔 생선전이 프라이팬 위에서 익어갔다. 노릇노릇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때 옆 아주머니의 손이 테이블 간 경계를 넘어 내가 풀어둔 계란물로 향했다. 마주친 눈은 이마에 패인 주름만큼이나 많고 자잘한 잔주름을 지니고 있었다. 아주머니와 할머니, 그 사이 어디쯤 돼 보이는 분은 애처로운 눈으로 내 눈길을 받았다. 그 눈은 분명 부탁을 구하는 눈이..
빅토리아 여왕 시대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극작가로 꼽히는 오스카 와일드. 우리에게는 ‘행복한 왕자’란 동화로 익히 알려져 있다. 동화에는 행복한 왕자의 수하인이자 친구인 제비 한 마리가 등장한다. 미리 말해두자면 제비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귀엽고, 또 순수하다. 추운 겨울날을 대비해 미리 따듯한 나라로 가야 했지만 갈대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그 시기를 놓치고 말기 때문이다. 갈대가 바람에 너무 잘 나부낀다고, 자기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이런저런 불평을 하는 대목에서는 코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제비는 때늦게라도 이집트로 가려 채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준비를 다 마치고 막 출발하려던 찰나, 행복한 왕자의 부탁을 듣는다. 주변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