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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려는 자 혹은 밝히려는 자

 

 

취재하기 위해 전화를 돌린다. 수화기 너머 누군가가 전화를 받는다. “안녕하세요. 에너지경제신문에 송진우 기자라고 합니다.”라고 운을 뗀다. 전화한 이유를 간단히 밝힌다. 수신자는 가만히 송신자의 문의 사항을 듣는다. 말을 끝마친 뒤, 잠깐의 정적. 수화기 너머 누군가가 둘 중 하나로 변하는 시간이다. 숨기려는 자 혹은 밝히려는 자로.

 

지금부터 딱 10일 뒤, 수습 딱지를 뗀다. 기자 인생으로 치자면 아직 걸음마도 떼지 않은 단계지만, 이제 전화를 걸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상대방이 반가워할 것인지 꺼림칙해하며 답변을 얼버무릴 것인지. 가령 신제품 출시나 사업 매각 건에 대해서 물으면 홍보팀에서는 이미 방어하는 자세를 취한 채 답변을 내놓는다. “사내 업무 기밀유지를 위해 말씀드릴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란 멘트도 단골이다. 이럴 땐 준비한 답변이 아무리 많은들 소용없다. ‘숨기려는 자에게서는 매번 같은 대답만 돌아올 뿐이니까.

 

 

 

반면 피해 신고나 우려되는 문제점을 문의할 때는 상황이 완전 정반대다. 노조나 피해자들에게는 그리 많은 질문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하소연 섞인 얘기를 듣다 보면 자연스레 사전 질문이 모두 해결되는 건 물론, 조사 당시 몰랐던 정보를 얻게 되기도 한다. 질문도 처음 인사를 드릴 때 한 번이면 족하다. 이후에는 ~”, “~ 그렇죠.” 정도의 맞장구만 쳐주면 된다.

 

홍보팀도 다르지 않다. 사내 문제 혹은 우려스러운 사태 발발을 예견하게 되면 굳이 요청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명자료를 건넨다. “이전부터 저희 사측에서는.”, “사실 그 문제가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죠.” 이전에는 그렇게 말을 아끼던 사람이 아주 딴판이 돼 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밝히려는 자의 모습, 많이는 아니더라도 한두 번 정도 봤다.

 

두 상황 중 어떤 것이 좋고 나쁘고, 가치가 있고 없는 하는 식의 경중의 문제를 따지는 것은 중요치 않다. 상대방이 말 아끼는 모습을 보고 이 사실이 맞긴 맞구나란 걸 확신할 수 있기도 하고, 취재원이 늘어놓는 일장연설을 통해서 해당 사안의 중요성을 재확인할 수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이 두 상황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당황하기도, 괜히 서럽기도 했는데 이젠 그럴 수밖에 없는 상대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랄까. 오늘의 전화 통화 목록을 확인하니, 20통 가까이 되는 전화를 주고받았다. 아직 멀었겠지만, 이렇게 기자 짬밥을 먹어가는 건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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