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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 시대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극작가로 꼽히는 오스카 와일드. 우리에게는 행복한 왕자란 동화로 익히 알려져 있다.

 

동화에는 행복한 왕자의 수하인이자 친구인 제비 한 마리가 등장한다. 미리 말해두자면 제비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귀엽고, 또 순수하다. 추운 겨울날을 대비해 미리 따듯한 나라로 가야 했지만 갈대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그 시기를 놓치고 말기 때문이다. 갈대가 바람에 너무 잘 나부낀다고, 자기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이런저런 불평을 하는 대목에서는 코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제비는 때늦게라도 이집트로 가려 채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준비를 다 마치고 막 출발하려던 찰나, 행복한 왕자의 부탁을 듣는다. 주변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자신의 몸에 붙은 보석을 좀 나눠주지 않겠느냐고.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귀엽고, 또 순수한 제비가 이런 선한 청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그때부터 제비의 세상 돌아다니기, 소위 말해 기자질이 시작된다.

 

제비는 공주님 밑에서 고된 재봉 일을 하는 하녀에게, 생계가 어려워 원고를 끝마치지 못하고 있는 예술가에게, 오늘 팔아야 할 성냥을 하수구에 빠뜨려버린 성냥팔이 소녀에게 행복한 왕자의 동상에 붙어있는 보석들을 하나둘씩 떼어 전달한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고, 행복한 왕자가 자신의 생에 미처 다 보지 못한 지난하고, 또 치열한 삶이 있었다.

 



행복한 왕자의 몸을 장식했던 보석들이 이내 바닥났다. 열심히 세상을 오가던 제비도 이집트로 갈 시기를 놓쳤다. 시장과 고위급 관료들은 볼품없어진 행복한 왕자 동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그들의 동상을 새로 세운다. 제비는 볼품없어진 행복한 왕자의 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죽음을 맞는다.

 

이 동화 한 편을 보고, 현대 언론을 떠올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집트로, 자신의 안위를 챙기려던 제비를 붙잡아둔 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다는 대의명분혹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정의정도였을 테다. 그렇게 행복한 왕자란 언론사 아래서 제비란 기자 한 명이 온 세상을 누비며, 또 고군분투하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도리어 부유한 집안에서 값나가는 장신구 같은 것들로 고갈돼가는 보석을 대신했다면 좀 현실적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 둘은 무던히도 바른 것들만 행동에 옮긴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면, 돈이 없으면 어쩔 도리가 없단 거다. 자금난에 허덕이는 회사가 그러하듯, 보석이 없어 볼품없어진 행복한 왕자가 그러하다. 결국 두 가지 선택권만 남는다. 다른 누군가의 동상이 된 채 그 자리를 지키던가 혹은 맘 놓고 떠나던가. 왕자와 제비가 모두 죽어버린다는 식의 결론은 다소 씁쓸했지만, 그래도 애처롭게 버팅기고 앉아 있지 않아서 좋았다. 시장 혹은 누군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동상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그곳에서 제비란 녀석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오는 형편이 돼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동화가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 Faction이 되는 건 아닐는지.

 


훗날 기자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제비가 가려 했던 사막만큼이나 막연하지만 혹여나 일말의 가능성을 붙잡고 된다면, 가난해도 행복한 왕자란 언론사 아래서 일하는 제비가 되고 싶다. 그런 선한 마음으로 날개를 퍼덕이는 제비, 기자가 되고 싶다.


 * 아는 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부분은 백석 시인의 '흰 바람벽이 있어' 시 부분 인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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