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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남은 너, <이터널 선샤인>

 


평범한 날이었어. 늘 있는 그런 퇴근길에 나는 올라있었고. 지하철에서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들의 지친 마음만큼이나 처진 어깨를 보고 있자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더라. 빛에 비친 현실의 모습이 검은 유리창에 비친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랄까. 노래나 들을 요량으로 이어폰을 귀에 꽂았어. 하필 흘러나왔던 노래가 밴드 혁오의 공드리. 미셸 공드리 감독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떠오르더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년 전, 네가 떠나버린 날 하염없이 봤었던 그 영화 말이야.

 

영화 첫 장면. 싱글 조엘(짐 캐리)이 출근을 하다말고 무작정 몬타우크 해변으로 향하는 것처럼 집으로 돌아온 난 양말도, 손도 씻지 않고 노트북을 켜서 영화를 찾았어. 최근 실행일이 2016312일 오후 12:35라고 남아있는 폴더에서 다행히 영화 파일을 찾을 수 있었어. 냉장고 앞에서 선 채로 대강 식사를 때우고 침대에 앉아 영화를 봤어. 물론, 그때와 같이 울거나 하진 않았어. 나름 덤덤한 채로.

 


하림이란 가수는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란 곡에서 가끔 속절없이 날 울린/그 노래로 남은 너라고 노래했지. 왜 하필 넌 노래가 아니라 영화였을까. 영화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너와 내가 나눴던 사랑의 편린들과 닮아있더라.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럿)이 바닷가에서 만나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은 널 처음 봤던 날의 부산 바다를 떠올리게 했고, 잊지도 못할 기억을 지우겠다며 반쯤 얼이 나간 채로 집 안에서 클레멘타인과 얽힌 물건을 죄다 끌어모으는 조엘의 행동은 네게 이별통보를 받은 뒤 물건을 하나둘 정리하던 때의 내 모습 같았지. 그땐 정말 그렇게 하면 잊힐 줄 알았어. 조엘도 아마 그래서 그랬을 거야.

 

하지만 사랑이란 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잖아? 기억이란 건 시간과 공간의 결합체에 불과하지만, 사랑은 그 이상일 테니까. 그 시절 그때로 다시 되돌아간다 해도 우리가 그때와 똑같은 느낌을 공유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말이야. 라쿠나 병원의 직원인 매리는 철학자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렇지 않다고, 기억을 지우는 의료 행위는 옳은 거라고 두둔하지만, 


망각한 자는 행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Blessed are th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그녀 역시 종국에 가서는 그 행위에 의심을 품게 되잖아. 정의 혹은 도덕에 반한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다시 실수를 되풀이한 자신을 보고 그 믿음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지. 니체가 말하고자 한 건 허무주의 맥락 속에서의 망각, 그런 게 아니었거든. 오히려 메멘토 비베레(Memento vivere). 삶을 기억하라!”고 외쳤던 철학자였지.



만약 이 영화를 너와 다투기 전날 밤. 혹은 그전에 봤었더라면 나는 이런저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네게 "Okay"란 말을 건넬 수 있었을까. 서로가 과거에 기억을 지웠단 사실을 깨닫고, 새로 시작되는 관계 역시 이전과 이유로 끝날 것이라며 불안해하는 클레멘타인에게 어쩔 수 없단 식으로, 모든 걸 다 받아들이겠단 식으로 깊은 한숨과 함께 “Okay”란 말을 내뱉는 조엘처럼 말이야. 영화 속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평가받는 그 부분을 볼 때면,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이란 시가 떠올라.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이란 구절 속의 '당신'이란 말에는 복도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주고받았던 "Okay"란 말처럼 얼마나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건지.

 


“sitting on the sunshine/Sunshine is over me she gets over me/Make us feel alive/

sunshine is over me she gets over me//She will love”


여전히 잘 지내고 있지? 난 이렇게 가끔씩 혁오가 미셸 공드리를 오마주해 만들었다는 공드리란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이터널 선샤인>을 떠올리며 영화로 남은 널 추억하며 지내. 원제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처럼 티끌 없이 맑았던 그 시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회상하면서 말이야. 물론 영화에서처럼, 언젠가 생기발랄하고 조금은 특이한 클레멘타인이란 여자가 뜬금없이 “Do I know you?”란 말로 내 삶에 나타나 줄 거란 발칙한 기대도 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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