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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블루보틀 Blue bottle 커피가 커피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고 있다. 바로, 핸드드립 커피의 귀환이다. 2005년 샌프란시스코 친구네 집 차고에서 개장한 첫 매장.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에스프레소 커피가 판을 치는 세상에, 핸드드립 커피라니"라는 핀잔 섞인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제임스 프리먼은 50세란 연륜을 바탕으로 한 잔, 한 잔 장신정신을 듬뿍 담아낸 커피를 손님들에게 대접하기 시작했고, 이런 그의 정성과 노력은 금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샌프란시스코의 명소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스타벅스가 마이크로소프트라면 블루보틀은 커피업계의 애플이라고 할 수 있다"

"블루보틀이 커피산업에 '제3의 물결'을 일으켰다."

- 뉴욕타임즈 曰


하지만 이런 현상이 비단 그의 장인정신과 고집에서 이뤄졌다고만 볼 수 있을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문학작품을 비평할 때에도 그 작가가 살았던 시대를 간과할 수 없듯이, 이런 유행에도 시대적 흐름이 반영됐을 것이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린 그간 영국발(發) 증기기관과 대량생산으로 대변되는 1, 2차 산업혁명을 거쳤으며 인터넷이란 영역이 일군 3차 산업혁명의 결과물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융합'이란 키워드와 인공지능(AI)이 빚어낼 4차 산업혁명의 문턱 앞에 와 있다. 바로 이 시기. 3차 산업혁명과 4차 산업혁명 사이. 어찌 보면 쉬어간다는 의미의 쉼, 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시기 덕분에 다시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맛을 추출하는 핸드드립 커피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사실 핸드드립 커피는 커피분야 기술 발전의 회귀라 볼 수 있을 정도로 특이한 현상이다.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발견된 커피는 끓여 먹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익숙해졌다. 그러다 터키로 넘어가, 커피 원두를 볶고 갈아먹는 식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이러한 터키식 커피는 마시고 난 뒤 텁텁한 원두 가루가 입안에 남는다는 게 단점으로 지적돼왔다. 오죽하면 사람의 이만 보아도 그 사람이 커피를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에 보기 싫게 원두 가루가 남았다는 것.



이를 보완하고자 등장한 게 드립커피. 종이필터를 이용해 한 번 걸러 마시는 방식이다. 터키식 커피에 비해 상대적으로 맛이 연했지만 그만큼 깔끔했고, 무엇보다 이에 보기 흉하게 끼게 될 원두가루 걱정을 덜어줬다. 단,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게 유일한 문제점이었다. 이를 보완하고자 20세기 초 이탈리아인 베제라(Bezzera)가 증기압을 이용한 에스프레소 머신을 발명하게 됐고, 이는 커피업계의 급성장을 가능케 했다. 1, 2, 3차 산업혁명에서 빠뜨려선 안 될 '속도의 미학'과도 궤를 같이하며, 현대까지 커피업계의 호황을 이끌었다.


하지만 그런 에스프레소기가 블루보틀 Blue bottle에는 없다. 오로지 필터와 원두가루 그리고 천천히 커피를 추출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정확히 에스프레소기가 발견되기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이다. 트렌드가 변화한 요인 중 하나로 향을 지적한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적당히 달궈진 물이 커피가루에 스며들며 내뿜는 향을 맡아본 이는 그 향긋한 내음을 결코 잊지 못할 테니. 하지만 세 치 혀가 느낀다는 맛을 지적한다면 다소 무리가 있다. 비록 에스프레소기를 통해 추출한 커피가 쓴맛과 원두의 탄맛을 함유하고 있긴 하지만, 기기를 보완하고 발달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개선됐기 때문.



한참을 돌아왔지만, 필자의 편협한 시각으로는 이런 경향이 여가 시간의 유무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4차 산업혁명을 문전에 둔 지금. 세계는 잠깐 멈춰서서 숨 고르기를 하고 있는 것과 같다. 경제분야는 이미 세계적으로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었다. 조만간 4차 산업혁명이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테지만, 아직까지는 도전 및 시도 단계에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런 변화를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그런 시기가 바로 지금이란 거다. 앞뒤 분간없이 마구 달려오다, 멈춰선 채 방향성을 재성찰하는 시기.


사람들이 여유가 생겼다. 금전적 여유는 아니더라도, 바리스타의 정성이 커피에 녹아내리는 걸 보고 또 기다릴 줄 아는, 그런 여유 말이다. 내가 블루보틀 Blue bottle의 성공을 반기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노령의 클라리넷 연주자의 창업 도전이 성공해서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여유를 가지게 된 데에 반가움을 표하는 바다. 그리고 부디 이런 여유가 차(茶) 혹은 디저트 문화를 넘어 우리네 식탁에까지 퍼져왔으면 한다. 그래서 나 같이 밥을 천천히 먹는 사람들이 흡입하듯 드시는 부장님의 식사 속도에 맞춰 들이키듯 밥을 먹어치우는 사태가 점점 줄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계 역사상 이례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한국에도 하루빨리 '속도의 미학'이 아닌 '여유의 미덕'이 찾아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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