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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한 원작 느낌 그대로 스크린으로, 트레버 넌 <십이야>



오래 전부터 소설, 희곡 등 활자화된 문학 작품은 영화 각색의 주된 대상이 되곤 했다. 영화로 소위 대박을 쳤다고 부를 법한 것들, 가령 <반지의 제왕>이라거나 <해리포터 시리즈> 같은 것들 역시 소설이 원작이었다. 순수 창작 영상물이 아닌 원작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의 경우, 어떤 식으로든 다음의 질문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원작을 얼마만큼 살릴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연출자의 역량이다.

 

셰익스피어의 5대 희곡 중 하나인 십이야1996년 영화 <십이야(Twelfth Night: Or What You Will)>로 각색한 영국 감독 트레버 넌은 위의 질문에 뭐라고 답했을까. 필자의 견해로 예견해 보자면 아마 원작을 살릴 만큼 충분히 살리되, 현대의 입맛에 거부감이 없도록 만들려고 했다.” 정도로 대답했을 것이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은 눈치 챘겠지만, 실제로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란 희곡이 그대로 스크린에 반영됐다고 할 만큼 그의 작품은 원작에 충실한 영화였다.

 


우선, 주요 인물의 캐스팅 자체가 원작 작품의 등장인물을 그대로 영화로 되살려놓은 듯 훌륭했다. 누가 뭐래도 십이야의 주요 등장인물은 사랑의 삼각관계를 팽팽하게 이끌어가는 세 사람 올리비아, 오시노 그리고 비올라다. 원작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캐스팅 리스트만 보고도 어느 배우가 어떤 역할을 할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을 테다. 특유의 강단과 열정적인 사랑을 보유한 올리비아 역은 다른 누구보다 헬레나 보넘카터에게 적절했고, 끊임없는 구애로 남성적인 사랑의 전형을 연기한 오시노 경은 딱 봐도 남성적 색체가 짙게 묻어나오는 토비 스티븐스가 제격이었다. 콧수염 장식 하나로 남성과 여성을 오가는, 십이야작품의 백미라고도 볼 수 있는 비올라 역엔 이모겐 스텁스가 배정됐다. 굵고 낮은 톤의 목소리로 오시노 경에게 아득바득 대들었던 남장 연기와 남성의 전유물인 칼싸움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비올라의 대조적인 모습은 그녀의 연기력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만약 트레버 넌 감독이 원작에 변화를 꾀했다면 감히 보지 못했을 케미(Chemi), 즉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인물을 평하는 데 빼놓지 말아야 할 배역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광대 역할의 벤 킹즐리다. 굳이 원작과 다른 등장인물을 들추자면 벤 킹즐리가 연기한 광대가 될 것이다.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는 다소 중후하고 차분한 느낌이 강하다. 마냥 까불고 발랄하며 주책없이 행동하는 광대를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했을 수도 있겠다. 이는 아무래도 감독이 사랑이란 주제를 전달하고 주인에 대한 직언, 쓴소리를 서슴지 않는 광대의 비판자 역할에 더 주목한 탓으로 여겨진다. 광대만이 던지는 특유의 익살스럽고 짓궂은 농담도 중요하지만 영화 속에서 사랑이란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노래해 줄 인물이 한 명 쯤은 필요했다



과거 한때 등장인물 말볼리오가 골탕 먹는 장면이 인기였던 터에 십이야란 작품이 말볼리오란 극 중 인물의 이름으로 상영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트레버 넌의 영화를 다시 상영한다면 페스트라는 광대 이름을 따도 괜찮을 정도로 광대의 비중이 상당한 영화다. 도입부를 마치고 비로소 사랑이란 의미를 더듬기 시작할 때, 아코디언 연주와 함께 울려 퍼지는 광대의 노래는 작품 중 유일하게 관객의 시선을 차분하게 사로잡는 장면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님이여, 어디를 가시나요?

발길을 멈추고 진정한 사랑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세요.

높게도 낮게도 부를 수 있는 사랑의 노래를. (2340-42)

 

셰익스피어의 십이야가 씌어진 건 16세기경이지만 트레버 넌 감독의 <십이야(Twelfth Night: Or What You Will)>19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트레버 넌은 중세와 현대를 넘어가는 과도기 19세기를 선택함으로써 고전의 맛을 살리는 동시에 모던한 세련미까지 잡아냈다. 과연 셰익스피어의 대가로 불리는 그의 연출력과 노련미가 돋보인 설정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일리리야란 섬에서 연중 맑은 날씨가 지속되는 부분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또 다른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이 연상됐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창한 날씨로 말미암아 한 여름밤의 꿈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전원에서 풍겨오는 특유의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됐고,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사랑의 작대기가 결말에 이르러 해소된다는 부분 역시 한 여름밤의 꿈전개와 결을 같이 했다.

 

주변에서 누군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그 중에서도 십이야에 관심이 있다면 감독 트레버 넌 연출의 <십이야(Twelfth Night: Or What You Will)>를 추천하는 게 가장 무난하겠다. <십이야> 이외에도 <리어왕>, <맥베스> 등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제작한 그의 이력이 충분히 신뢰성을 뒷받침해주고 있을뿐더러 원작을 크게 뒤바꾸거나 각색하지 않았기에 영화를 통해 원작의 내용까지 충분히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셰익스피어가 현대로 잠깐 거슬러 올라와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한다면 딱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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