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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생각 제1회 청년이야기 공모전 동상
결국 다 살아가는 것
한국이 싫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한국에서 20대로, 청춘으로 살아가는 게 싫었다. 실망감인지 회의감인지 모를 것들이 언제부턴가 가슴 속에 차오르기 시작했고, 답답했다.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토끼굴에 빠지는 것만큼 짜릿하거나 즐겁지 않았다. 한 두어 번의 술자리와 MT가 고작이었고, 이후엔 제각기 살길을 찾아 학교와 방만 오가는 생활의 반복뿐이었다. 시험만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노라면 대학교란 건 참, 고등학교의 연장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맞닥뜨리게 된 이십대의 절반. 스물하고도 다섯 살.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떠나버리는, 날아가는 꿈을 자주 꿨던 게.
자원활동이란 이름 하에 미얀마로 5개월 간 갈 수 있는 티켓을 손에 쥔 면접관은 물었다. “다른 아이들은 꽤나 오래 전부터 이 봉사활동을 위해 준비하고 노력했는데, 그런 아이들 말고 왜 굳이 네가 가야 하느냐?”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부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 전공은 봉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고, 이전에도 봉사에 대해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묵묵부답인 채로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면접관이 기어코 같은 질문을 되풀이 했을 때. 당황한 나머지 전날 준비했던 그럴듯한 언변이 아닌, 진심이 쏟아져 나왔다.
이게 정말 필요하다고.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게 20대의 전부고, 청춘이란 게 고작 이런 거라면 너무 실망할 것 같다고. 다른 나라의 청춘들도 이렇게 지내는지, 정말로 이게 다인지 내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다고 토로하고 말았다.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시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란 축축한 음성을 끝으로, 면접장을 빠져나왔다.
미얀마에서 많은 청춘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잇대는 비슷하지만 다른 외형을, 고민을, 삶을 지닌 그들이었다. 우리의 1980년대를 떠올리면 비슷할 것 같은 미얀마의 수도, 양곤. 그곳에는 저마다의 이유로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올라온 청춘들이 득실거렸다. 아직 이십대 초반임에도 불구 가족부양이란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채 이곳까지 떠밀려 온 녀석도 있었고, 단순히 도시에서의 삶의 동경해 악착같이 도시 언저리에 붙어 지내는 이들도 있었다.
한국어를 포함한 영어, 일본어 등 선진국 언어를 악착같이 배워 언젠가 큰돈을 벌어오겠다고 코리안드림,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친구들도 물론 많았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도시답게 화폐의 가치는 중요했고 다들 돈이란 화폐, 그 속에서 희망을 찾고 있었다. 고된 노동 환경 속에서 악착같이 일하는 그들을 볼 때면 한국에서 짊어지고 있었던 청춘에 대한 고민은 한없이 초라해지곤 했다. 그저 단순히 배부른 고민에, 투정에 불과했던가.
이런 생각을 환기(換氣)시켜 준 건 ‘뻬이네빈’이란 작은 산골 시골에서 만난 친구들, 그리고 그곳에서의 삶이었다. 도시 양곤에서 버스를 타고 10시간을 달린 것도 모자라 산을 오르기 위해 특수 제작된 트럭까지 타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매 끼마다 장작을 패 밥을 해야 하고, 밤이면 TV가 있는 집으로 오순도순모여 한국드라마를 시청하는 신기한 마을. 그곳에서 만난 청년들의 삶에는 ‘다름’이 있었다. 해 뜨면 차밭에 나가 어린잎을 따고 저녁이면 돌아와 잎을 말린다. 철에 따라 오렌지를 수확하기도 한다. 광주리를 인 친구들 틈바구니에 섞인 채 노닥거리기를 며칠. 여느 때와 같이 ‘러폐’라고 하는 미얀마 전통 찻잎을 따는데, 순간 ‘이곳에서 태어났으면 정말 한국에서와는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괜히 묘한 기분이 감돌아 한 숨 쉬려 뒤를 도는데, 때마침 유목하는 친구가 흰 소들을 이끌고 산천초목 펼쳐진 산허리를 비껴가고 있었다. 부족민 언어와 한국어를 서로 가르쳐주기도, 근처 절에 들러 함께 물을 길어오기도, 불 피우는 걸 실패할 때면 염치불구하고 밥을 얻어먹기도 했던 그 특별한 곳에서의 생활은 아무 말 없이 가르쳐줬다. 도시에서는 볼 수도, 배울 수도 없었던 특별한 뭔가를.
한국에 다시 돌아온 난 꽤나 조용해졌다. 미얀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이것저것 쉼 없이 떠들어대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가만히 보낸다. 학교를 복학해 다니기 시작했고, 여느 한국의 이십대들처럼 자격증을 준비하는 동시에 취업 경향을 살펴보고 있다. 달라진 건 없다. 다만 이전에는 불평불만을 가득 껴안은 채 하루하루를 보냈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 미얀마에서 가져온 수많은 것들 중 하나는 다들 저마다의 청춘을 어떤 식으로든 보내고 있단 것.
그러니 나도 미생이란 만화에 나왔던 비유처럼, 세상이란 바둑판에 저마다의 바둑을 두기 위한 준비를 한다. 미얀마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다 살아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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