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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전 남친의 선물을 버려야 할까 <이터널 선샤인>


헤어지고 난 후 혹은 헤어지자란 말을 입 밖에 내기 전날 밤 이별의 징후를 감지했을 때. 우리는 로맨틱한 사랑의 꽃 한 송이가 피었다 지는 것과는 별개로 꽤나 현실적은 문제 하나를 마주해야 한다. 전 남친 혹은 전 여친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 하는 고민이다. 정녕 우리는 다음 사랑을 기약하기 위해 전 애인과 주고받았던 선물을 대여기간이 지나 연체된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듯 돌려주어야 할까. 아니면 더는 입지 않는 옷을 헌옷수거함에 넣어버리듯 버려야만 하는 것일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는 이 고민을 끝까지 밀고나가 물건이나 선물 따위가 아닌 기억 자체를 지워버리는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연애 후반기. 으레 누구나 다 그렇듯 남녀 주인공 둘은 훗날 기억도 나지 않을 사소한 일로 다투고 헤어진다. 그리고 누구나 다 그렇듯 미련이 남은 남자는 여자를 찾아가 한 입 베어 문 사과만큼이나 평범한 사과로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 싱글 조엘(짐 캐리) 역시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럿)이 일하는 서점으로 찾아가 어색하게 말을 붙인다. 하지만 그녀는 몇 날 며칠 몸을 섞고 사랑을 나눴던 그를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양 취급한다.

“Excuse me? Can I help you find something, sir?

 

며칠 지나지 않아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차 안에서 “why?”, “why!”라 울부짖으며 말 그대로 폭풍눈물을 쏟아낸다. 애꿎은 차량 핸들에 분풀이해가며 비니를 눌러쓴 채 차오르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하는 그를 본다면, 당신의 마음속에서도 절로 안쓰러운 마음이 일 것이다. 그러나 이내 슬픔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변하고 조엘은 그녀와 관련된 물품을 죄다 긁어모은 뒤 기억을 지워주는 라쿠나 병원을 찾는다.


 

과연 이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영화에서는 실제로 주인공 조엘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기억을 지우는 병원을 찾는다. 특히 전 애인이 생각나기 쉬운 밸런타인 데이 전날엔 대목이라 예약 잡기도 힘든 상황이 벌어진다. 영화 속 또 다른 주연이자 라쿠나 병원의 직원인 매리는 철학자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기억을 제거하는 의료행위를 두둔한다.

 “망각한 자는 행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Blessed are the forgetful, for they get the better even of their blunders."

 

하지만 단순히 기억을 지우는 것만으로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 -해변에서 처음 만났고, 클레멘타인이란 이름으로 지어낸 어쭙잖은 농담을 주고받았고, 머리를 기괴한 색으로 자주 염색했으며, 자정 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아 자주 다퉜던-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면 오산이다. 지난 시절의 기억은 단지 시간과 공간이란 영역에 속해있을 뿐이지만, 우리가 나눴던 사랑은 그 이상인 것을. 상상해 보라. 기억을 지웠다고 지난 애인을 마주쳤을 때, 정말로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당신은 그럴 자신이 있는가?

 


다시 우리의 고민으로 돌아오자. 이별을 겪은 후 우리는 전 남친 혹은 전 여친과 함께 사용했던 물건을 버려야 하는가, 돌려줘야 하는가. 정답은 없다. 무엇을 선택하든 결과는 당신의 몫이다. 다만 전 애인과 얽힌 기억을 완전히 정리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실행하려 한다면, 하느니만 못하다고 전하고 싶다. 기억을 지웠던 조엘과 클레멘타인도 결국 다시 만나고 마는 마당에, 그깟 물건 몇 개 정리한다고 해서 전 애인과 사랑했던 기억을 떨쳐낼 순 없을 테니. 혹시 후일 만나게 될 애인이 왜 전 애인이 줬던 선물을 정리하지 않았어?”라고 핀잔조로 물어온다면, 다음과 같이 답하는 건 어떨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 봤어? 선물 같은 건 중요치 않아. 거기엔 물건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는 두 남녀가 나오는데. 아니다. 이참에 <이터널 선샤인> 같이 보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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