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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오슨웰즈 <맥베스>

 

일본 전국시대의 주()무대였던 쿄토, 오사카 등지를 걷다 발견한 스코틀랜드 음식점. 외관과 달리 내부 인테리어는 동양적 색채가 짙은 일본풍이다. 고픈 속을 달래기 위해 스코틀랜드 전통음식 하기스(haggis)를 주문했다. 하기스는 양 내장 요리라고도 불리는데, 양의 심장, , 폐 그리고 야채와 오트밀로 속을 만들어 양의 위장에 넣고 쪄내는 음식이다. 메인 메뉴인 하기스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한 입 베어 무는데, 이게 웬일. 소스가 미소(味噌)를 살짝 가미한 일본식이다. 뿐만 아니라 부수적으로 따라 나온 사이드 메뉴들도 일본식 스끼다시였다.

오슨웰즈의 <맥베스>를 보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집의 성(Throne Of Blood)>을 감상한 느낌은 딱 위의 상황, 일본에서 스코틀랜드의 전통음식을 주문해 먹는 것 같았다.

 

* 스코틀랜드 전통음식 하기스 Haggis


두 영화 모두 전체적인 구성은 원작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동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똑같다. 일어나야 할 사건은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원작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순서대로 일어난다. 초현실적인 뭔가에 의해 예언을 듣게 되고, 그 예언이 하나둘씩 적중해 나감에 따라 왕을 죽이는 반역을 꾀하게 되는 주인공의 심리 변화. 왕좌의 앉고서도 떨쳐내지 못하는 두려움과 불안감 그리고 부인의 정신착란증세. 마무리는 주인공의 비극적인 결말. 심지어 주요 등장인물의 성격까지 닮아있기에 누가 봐도 ,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맥베스를 원작으로 다루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기스라는 음식을 일본에서 먹든, 다른 나라 어디에서 먹든 스코틀랜드 전통음식이란 걸 부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다만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유사하게 영화화시켜 재현한 오슨웰즈의 <맥베스>와 달리,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집의 성(Throne Of Blood)>은 하기스란 서양 음식에 동양적 소스를 끼얹은 것처럼 영화 곳곳에 거쳐 굵직하게 혹은 사소하게나마 연출을 통해 일본식 색채를 버무려놓았다. 어떤 점들이 그러한지 하나하나 순서대로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세 마녀가 등장해야 하는 부분에서 뜬금없이 한 노파가 등장한다. 어린아이 모양의 토우(土偶)를 손에 쥔 세 마녀와 달리 하얀 소복을 입은 노파는 조용히 물레를 돌린다. 맥베스로 대변되는 장군 와시즈가 장차 왕이 될 거라 예언하는 대사로 보아 주인공을 혼란에 빠뜨리는 초현실적 존재로 추리되지만, 그 모습이 원작과는 확연히 다르다. ‘뉴스앤조이란 매체에 실린 기사는 노파를 그녀는 거미줄에 걸린 날파리를 공격하는 거미의 신이요, 인생의 실을 잦는 운명의 여신 클로소(Clotho)의 동양적 현신이었다.”라고 풀이하는데, 설득력이 전혀 없진 않다. 인생의 실이란 물레를 통해 주인공의 생()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게 아니라 간접적으로 그리고 교묘하게 관여하고 있는 모습이 알쏭달쏭하고 묘한 예언을 내뱉는 세 마녀와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미심쩍은 건 클로소라는 운명의 여신이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차용됐다는 사실. 원작을 각색했다면 당연히 일본풍으로 했을 텐데 굳이 서양 신화에서 참고할 필요가 있었을까, 란 의문점이 남는다. 오슨웰즈의 <맥베스>에서 세 마녀가 쥐고 있는 어린아이 형상의 토우(土偶)같은 경우, 허무맹랑한 마녀들의 말만 믿고 욕심을 이기지 못한 채 자신의 상황을 파국까지 몰고 가는 맥베스의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을 대변한다.

이후에는 하기스에 따라 나온 동양식 사이드 메뉴, 스끼다시와 같이 <거미집이 성>에만 나오는 자잘한 차별화된 연출들이 눈에 뜨이는데, 먼저 레이디 맥베스 역할의 아시즈의 대사이다. 와시즈는 왕을 살해하는 거사를 앞두고 흔들리는 보이는데, 이때에 아시즈는 “When Miki tells him(His Lordship) what happened in the forest?”와 같은 말을 통해 동료에 대한 배신, 경쟁 심리를 은근히 부추긴다. 이는 남성성과 숨은 욕망만을 부추기는 오슨웰즈의 <맥베스>의 레이디 맥베스와 차별화된 것으로 일본의 중세시대에 있었던 혼란기를, 똑같은 사무라이지만 어제의 동료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는 그런 어지러운 전국시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사라고 볼 수 있다.


일본식 구로사와 아키라 <거미집의 성(Throne Of Blood)>


반역자가 자살했던 다다미방이 영화 속에 등장한 것도 꽤나 흥미롭다. 반역자의 핏자국이 채 지워지기도 전, 국왕의 방문으로 인해 와시즈와 아시즈는 임시로 그 방을 쓰게 된다. 이곳에서 둘은 왕을 죽일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이를 통해 감독은 반역자가 있었던 방에서 또 다른 반역자가 나오는 악순환의 반복을 그려낸다.

국왕 살해 이후 뜬금없이 말 한 마리가 대저택 안에서 미쳐 날뛰는 소동이 벌어지는 것도 원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내용 중 하나. 이는 아마 와시즈의 불안정한 내면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아닌가 싶다. 신하들은 말을 진정시키려 고군분투(孤軍奮鬪)하지만 말고삐조차 제대로 틀어쥘 수가 없는데, 그 말이 퍽이나 와시즈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 실제로 이 과정에서 와시즈는 동료였던 미키와 그의 아들을 죽이려하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자객까지 살해하는 등 정신 나간 폭군(暴君)의 전형적인 행보를 보인다. 만찬에 앞서 진행된 이야기꾼의 공연에서 “O spirits, when a man rebels against lord, he incurs heaven’s vengeance.”란 대사를 듣고 신경질 내는 모습에서도 그의 예민함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꾼의 등장 역시 동양적 분위기를 위해 구현된 연출로, 조선시대로 치환하자면 사당패, 광대 그리고 소설을 읽어주는 전기수(傳奇叟) 정도가 되겠다. 최후의 결전을 앞둔 상황 속에서 사무라이 신하들이 “I will tell you something : the rats have begun to leave. It’s said that rats leave a house before it catches fires”란 말을 하는 것 역시, 앞으로 벌어질 전쟁을 암시하는 것과 더불어 일본에서 전해지는 미신과 속담을 담아낸 대사이다.

결말 부분은 원작에 비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아시즈의 아기 유산이고, 둘째가 적이 아닌 아군 신하들에게 살해되는 와시즈이다. 와시즈는 아시즈가 아기를 가졌단 소식에 자신의 후세가 왕좌를 계승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지만 유산과 동시에 그것이 충격으로 되돌아온다. 또한 결전을 앞둔 와시즈는 노파의 예언을 신하들에게 떠벌리며 “I saw her again and she told me more”, “whatever happen, I shall not lose a single battle unless cobweb forest begins to move.”라 승리를 자신하지만, 결국 그 말이 역()으로 돌아와 이를 선()목격한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하나의 원작 셰익스피어 <맥베스>를 두고 두 감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영화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오슨웰즈의 <맥베스>의 경우, 어린이 토우(土偶), 왕좌를 쓴 맥베스의 얼굴을 흐트러지게 비추는 거울 등 나름대로 연출을 시도했지만, 그보다는 원작을 가장 그럴듯하게 재현해낸 공로가 크다. 반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집의 성(Throne Of Blood)>의 경우, 자욱한 안개와 일본의 전통가옥 등 다양한 공간적 요소와 재치 있는 연출로 맥베스를 동양화, 일본화 하는 데에 애를 썼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셰익스피어 희극의 맛, 정수(精髓)라 할 수 있는 대사를 극히 제한하는 바람에 도리어 아쉬움이 좀 남는다. 첫 문단에서 언급했던 상황처럼 여행지에서 현지 식당을 갔으면 최소한 인사정도는 현지어로 준비를 해야 했는데, 게일어는 전혀 하지 않고 일본어로 주문을 받는 격이었다고 할까? 어쨌든 간에 원작 하나에서 비롯됐지만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영화를 비교 및 감상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꽤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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