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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들의 히치하이킹, 그 미친 짓
사실 도입부부터 부러웠어. “내가 땡 전 한 푼 없이 유럽에서 여행하는 법을 찾았어.”라는 맏형 호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들려온 주변 소음들. 현학, 승협, 휘 이 세 동생의 웃음 섞인 잡담. 터무니없는 제안에 귀 기울여주는 무리들, 또 그런 여행에 동참해주고 동조해주는 사람들이 있단 것. 그 자체가 부러웠어.
‘그래…. 결국 주변에 누군가라도 있어야 저런 용기가 나는 거야.’
그러나 소심한 질투는 오래가지 않았어. 홍보 영상을 의뢰할 호스텔을 찾아 남쪽으로, 막연히 히치하이킹으로 가던 중 일행 일부가 중도 하차를 하더라고. 그제야 슬슬 이게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인 게 실감이 나더라. 카메라에 모두 담기지 않았지만 현실의 벽,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벽이 끈끈했던 그들 사이를 갈라놨을 게 분명해. 정예멤버 넷에겐 말릴 명분도, 그럴 듯한 껀덕지도 없었지. 역에서 떠난 이들을 배웅하고 돌아선 호재의 눈밑엔 다크서클이 짙었고, 막연히 웃고 즐기던 동생들의 웃음에도 쓴맛이 베였더라. 그래도 남쪽으로 가는 여정은 계속됐어. 멈추지 않고.
그 뒤 결국 그들은 해냈어.
이어진 뜻밖의 홍보 영상 대박과 뮤직비디오 제작 기회 성취 등 그들의 축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려고. 그들의 샴페인이 내게까지 전해지 않았을뿐더러 생각할수록 은근 부럽기 때문이야. 다만 한 가지. 망치로 내 머리통을 쾅, 하고 내리쳤던 장면은 기술해야 성이 좀 풀릴 것 같으니, 밑에 적어두고 가도록 할게.
- 아르코의 마지막 메일
앞서 말했듯 그들의 용기는 함께이기에 가능한, 즉 무리에서 기인한 것이라 여겼어. 똘똘 뭉친 그들은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한만큼 각별해 보였으니까. 우리도 중, 고등학교 시절 우르르 모여다닐 때면 괜한 치기들을 꽤나 부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르코의 뮤직비디오를 두고 고심하던 호재가 동생들을 뒤로한 채 홀로 떠날 결정을 했을 때, 그땐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 무리에서 발휘된 가벼운 치기심으로 그들이 움직인 게 아니란 사실을.(물론 아르코의 시 한 편 같은 마지막 메일의 몫이 컸을 거야.) 그리고 그 미친 짓 같아 보이는 열정은 영화 크레딧이 내려간 후까지도, 오래도록 부럽더라.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의 발목을 잡을만한 명분은 충분했어. 이미 계획한 성공을 거뒀고, 아르코도 미완성된 뮤직비디오에 대해 이해해줬지. 더해서 귀국 날짜도 며칠 남지 않았고 그와 함께 지내온 동생들도 더 이상 무리하지 말고 머무르기를 원했거든. 그런데도 그는 떠나. 다시 처음처럼 히치하이킹을 해야 하는 처지를 감수하고도 말이야.
누구나 다 있을 거야. 돌이켜 보면 이해되지 않는, 그러나 과거의 자신은 저질렀던,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같은 그 미친 짓을 하나씩은 다들 지니고 살아갈 거야. 한 남자는 카메라에 빠져 아직 청춘이란 이유로 무작정 어디론가 어디론가 출사를 떠났겠고, 한 여자는 이십대가 익어갈 무렵 사랑에 올인해 자다가도 이불을 발로 찰 기억을 만들었겠지. 이름 모를 누군가는 그게 산이었기에 무리해서라도 올랐던 거고, 또 다른 이에겐 여행이었기에 무작정 길손되기를 작정했던 거고.
얼마 전 학교에 찾아온 선배는 그러더라. 드라마 작가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몇 년간 속으로 썩히기만 했다고. 그러다 1년 아카데미에 등록해 제대로 배워본 뒤에야 만족하고 포기할 수 있었다고. 그래. 맞아. 누구나 다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에 나온 surplus들 같이 잘 되진 못 할 거야. 그러나 그런 미친 짓에 대한 기억 하나 쯤은 다들 있지 않나?
나 또한 그런 게 아닐까, 싶어. 지금 아직 풀지 못한 게 남아서 이렇게 또 끼적이는 거겠지. 이게 사소한 짓이 될지, 미친 짓이 될지는 몰라. 모르겠다. 다만 첫 발은 내디뎠으니 어디로든 가야하지 않을까.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던 그들처럼. 지도 사야할 돈으로 기꺼이 치킨을 사먹은 그 막장들처럼 말이야.
"마침내 우리의 긴 여정이 끝이 났다. 이제 우리에겐 돌아갈 학교도, 남아있는 돈도, 우리의 프로젝트도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한 번의 도전이 끝났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멈추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릴 망설이게 했던 건 사소한 것에 불과했고, 무모하고 위태로운 선택들이 오히려 우리를 용기 낼 수 있게 했다. 이제 우리는 길을 헤매거나 멈출 수밖에 없는 날이 오더라도 다시 한 걸음 나아가는 걸 결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 호재의 마지막 나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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