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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연극의 3요소라 하면 희곡, 배우, 관객을 일컫는다. 그간 대학교란 공간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학생들이 자체 제작한 연극 혹은 연극부 동아리가 주최한 연극을 몇 개 본 적이 있다. 학업과 병행하며 바빴을 그들의 노고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학생연극을 볼 때마다 느낀 건 희곡, 배우, 관객 중 유독 희곡이 두드러진단 점이었다. 꽤 머리가 큰 학생답게 그네들은 주로 부조리극 혹은 사회풍자극을 택해 공연을 올렸고, 다소 어리둥절한 상태로 끝난 연극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희곡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머릴 싸매곤 했다. 열연했고 또 그만큼의 준비했을, 연극의 한 요소인 배우들은 아쉽게도 연극 내에서 그 희곡을 전달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았다. 서툰 학생연극을 일부러 찾아 관객란 요소를 채워줄 이가 적은 현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하지만 1118일 광운대학교 도서관 영화상영실에서 본 ‘The Audition’이란 영문학과 연극은 나의 편견을 통째로 뒤흔든 것도 모자라 깨부순 연극이었다. 사실 그전부터 희곡에 대한 기대를 조금 하긴 했었다. 신웅재 교수님의 말을 통해 들은 줄거리, 일반적인 셰익스피어의 고전 연극을 답습하는 방식이 아닌 현대식 입맛에 맞게 각색해 공연된다는 정보는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을 뿐. 그 이상의 기대는 품지도,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단지 과제물을 써내기 위한 발걸음을 도서관 영화상영실까지 옮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연극이 끝난 뒤, 상황은 정반대였다. 한참을 올라가 있었던 내 광대는 이제 마치 내려오기를 거부라도 하는 듯 잔웃음을 떠나보내지 않았고, 손바닥은 야간의 찌릿찌릿한 고통이 계속해서 수반됨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에게 보내는 격려의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연극은 한 시골 변두리 마을에 셰익스피어를 공연하겠다고 찾아오는 감독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자도 모르는, 햄릿이라고 하는 연극의 주인공 이름을 아기 돼지 이름이라고 웃고 떠드는 농촌사람들을 상대로 셰익스피어를 가르치고, 또 공연하기 위해 대본을 나눠주고, 나아가 오디션을 개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차 배우로 거듭날 농촌 사람들은 대본 스크립트로 모기나 파리 따위를 잡는 것도 모자라, 햄릿이란 배우로서의 메소드 연기를 준비하기는커녕 각자의 개성을 무한대로 살린 채 오디션장을 찾는다. 바로 이 과정에서 익살스럽고 다채로운 색깔을 지닌, 그 중 몇몇은 다소 과한 컨셉을 지닌 배우들이 오디션에 임하게 되는데, 이 대목이 연극의 하이라이트이자 정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얼마나 많은 종류의 사람을, 성격을 연기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지원자들이 등장했다. 교수님의 말마따나 1인 다()역이 현장에서, 그것도 즉각 즉각 이뤄졌다. 냄새나는 농부, 수줍음 많은 사람, 재채기하는 소녀, 울보, 귀신 그리고 여장남자까지 대략 15개의 배역을 단 다섯 명의 배우가 번갈아가며 소화했다. 조금의 지체도 없이 무대 위에서 복장도, 분장도, 특색도 각양각색인 지원자가 수시로 뒤바뀌는 상황은 도무지 관객들로 하여금 연극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도대체 그 짧은 틈새마다 무대 뒤편에선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무대는 온전히 배우로, 배우의 역량으로 채워졌고 그때까지 극의 스토리 전개를 이끌었던 외지인 감독도 그때만큼은 자신의 본연의 역할인 조연으로 돌아감으로써, 이 연극이 온전히 학생연극, 학생들이 주연이 되는 연극이란 걸 증명해 보였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Whether 'tis nobler in the mind to suffer. The slings and arrows of outrageous fortune, or to take arms against a sea of troubles, And by opposing end them? To die: to sleep;”

script of the play Hamlet by William Shakespeare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란 작품에 나오는 대사를 한 줄 한 줄, 각기 다른 톤과 강세, 억양으로 소화하던 배우들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하다. 무대의 마무리, 커튼콜이 이어지는 동안 셰익스피어 연극 대회에서 각 배우에게 주는 상을 모두 광운대 학생들이 가져왔어야 했단 교수님의 평이 생각났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다시 연극의 3요소로 돌아오자. 되풀이하자면 연극의 3요소는 희곡, 배우, 관객이다. ‘The Audition’에서 각색된 각본, 희곡은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스러웠다. 시골 마을에 셰익스피어를 공연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포부는 도입부부터 관객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고, 연극 후반부에서 전달되는 셰익스피어는 누구의 것도 아니므로 누구나 다 즐길 수 있다.’는 주제와 메시지도 훌륭했다. 이번 연극의 가장 중차대한 역할을 담당했던 요소 배우.’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했다. 이전의 학생연극에서는 사실 무대 위의 배우를 다른 누군가로 대체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희곡을 전달하는 하나의 매개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반면 이번 연극에서는 ‘The Audition’이란 연극이 학생연극임을, 학생들이 아니면 안 됐을 정도의 아우라를 보여준 그런 배우들의 열연이 있었기에, 감히 대체 불가능할 정도였다. 끝으로 관객요소도 납득할 만큼 괜찮았다. 비록 자막이 제공되지 않아 영문과 학생 혹은 영어를 좀 알아듣는 학생들이 아니었다면 무리가 있었겠지만, 다수의 학생이 영문과 혹은 영어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여 그들에게 공부와 동시에 재미까지 선사한 연극이 아니었나, 싶다.


연극의 3요소를 두루 만족시켜준 훌륭한 연극이었고, 개인적으론 학생연극에 대한 편견을 깨게 만들어 준 고마운 극으로도 기억에 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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