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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설킨 삶과 그늘

 

문예중앙에서 출판한 이영광의 시집 그늘과 사귀다표지에는 명암明暗이 공존한다. 모서리는 밝은 흰색, 중앙은 어두운 흑색 그리고 그 사이, 명암이 교차하는 부분에는 갈색의 공간이 펼쳐진다. 뚜렷한 명암도 아닌 애매한 그 감색의 영역에 한 사내가 서있다. 어두운 그늘을 끼고 말이다.

 

시를 읽는 내내 나는 유독 이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를 읽으려 책을 펴거나 덮을 때에도 시선은 한사코 몇 초간 이 사내에게 머물렀다. 그늘과 사귀다란 시집 이름 그대로 그늘과 사귀고 있는 사람 혹은 단순하게 사내를 그려놓은 간단한 그림인데, 보면 볼수록 그렇게 단순치 않아 보였다. 그림자가 없는 건지 아니면 짙은 그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그 사람은 명암을 두루 갖춘 갈색 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 하나였다.

 

시를 읽어 나갈수록 그가 왜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갈색 빛을 띨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됐다. 어느 한 영역에 속하지 못하고 왜 사이에 위치하게 됐는지 헤아릴 수 있었다. 경계라는 시에서 황새가까이서 보면 그는 외발,/가늘고 위태로운 선 하나로/드넓은 수면의/평형을 잡고 있는 모습과 같이 시인 이영광 또한 어느 한 영역에 종속될 수 없는 모습이 엿보였다. “그의 외발은 무슨 까닭인가/그는 한 발 마저 디딜 곳을 끝내/찾지 못했다는 것일까란 물음에 당도하게 되는 것도 유사한 맥락으로 유추됐다. 그리고 끝내 그 사이에서 그가 사라지는 이유까지도.새는 문득, 평생의 경계에서/사라지고 없다란 구절처럼.

 

시집을 덮고서야 갈색 빛을 띤 그의 모습이, 삶에서 그늘과 사귀며 살아가고 있는 시인 이영광과 겹친다는 걸 깨달았다.

 

 

이영광의 시집 그늘과 사귀다에서 그늘은 단순히 휴식을 가져다주는, 햇살이란 이면에서 파생되는 자연현상이 아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다. 그렇기에 그가 사귀고 있는 그늘은 일반적인 그늘보다 더 짙고 깊다. 그리고 그의 삶 전반에 넓게 퍼져있다. 그의 시를 한땀 한땀 읽어내려 갈수록 그늘의 이미지는 조금씩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 포착할 수 있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늘은 일반적인 그늘에 비해 침울하고 무거운 속성을 갖는다. 그의 그늘죽음이란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단 걸 알고 시를 읽어 내려가면, 시인 이영광만이 죽음에 대해 서술할 수 있는 사뭇 묵직하고 둔중한 시어들을 마주하게 된다.

 

아버지 세상 뜨시고

몇 달 뒤에 형이 죽었다.

천둥 벼락도 불안 우울도 없이

전화벨이 몇 번씩 울었다.

 

(중략)

 

사람이 떠나자 죽음이 생명처럼 찾아왔다.

뭍에 끌려 나와서도 살아 파닥이는 은빛 생선들,

바람 지나간 벚나무 아래 고요히 숨 쉬는 흰 꽃잎들

나의 죽음은 백주 대낮의 백주 대낮 같은

번뜩이는 그늘이었다.

 

나는 그들이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들어와

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

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이라 생각한다.

-떵떵거리는부분

 

김영광의 시집 그늘과 사귀다에서 그늘이 왜 죽음으로 치환될 수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시가 바로 떵떵거리는이다. 그는 1연에서 담담하게, 차분하게 내뱉는다. “아버지의 죽음을. 그에게 찾아온 죽음은 가족의 죽음, 그보다 더 잔혹하고 깊다. 그에게는 크나큰 상처로, 또 슬픔으로 작용할지도 모를 가족의 죽음이지만 세상사는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둥 벼락도 불안 우울도 없이찾아온 죽음은 그에게 더 큰 시련으로 다가온다.

 

죽음이란 상황이 그에게 간접적이지만 진정한 본모습으로 찾아왔을 때, 그에게 서서히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을 자려고 눕는 순간까지 모든 일상생활 하나하나에 죽음을 암시하는 그늘이 잠식해온다. 그에게 더 이상 세상은 이전에 바라봤던 세상이 아니다. 세상은 백주 대낮의 백주 대낮 같은/번뜩이는 그늘이 드리운 삶으로 변했다. 드리운 그늘에는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들어와/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떵떵거리며 살기를 자처하는 그들이 있기에 더 짙고, 깊고, 아프다.

 

 

그가 죽음을 대면하는 장면들은 시집 그늘과 사귀다곳곳에 배어있다. 나무 金剛 로켓에서는 취한 몸을 리어카에 실어와 아랫목에 눕히듯/관을 내린다”, “다만 우리가 끝내 몰랐던 어둠 한 덩이가/일인승 비행정에 탑승하려 한다란 문장을 통해 죽은 이가 들어가야 하는 이란 것을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음복이란 시에서는 제상을 차리는 동안 풍문지가 가늘게 운다”, “그가 조용히 식사를 마치셨다/그가 어린애처럼 촛불을 흔드셨다란 문구로 죽은 이를 모시는 제사의 풍경을 서술하고 있다.

 

이 밖에도 냉동고에서 나온 죽음은 한 번 더 죽기 위해/화장장으로”(길의 장례), “수양버들 춤추는 길에/상여 하나 떠가네 / 제 발로는 더 이상 걷지 못하는 자의 집,/여러 몸이 메고 가네”, “식은 자를 메고 가 땅에 묻기도 했네”(수양버드나무 채찍), “과묵이 침묵으로 바뀌었을 뿐”(성묘) 등과 같은 여러 시편들에서 그는 죽음의 이미지를 흩뿌려놓았다.

 

, 천 년 전의 마야 인형은

마른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웅크려 울고 있다

 

들어서는 안 될 소리가 파고들어온다, 어쩌랴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던 자세가 몸부림치다

저렇게 산 채로 굳었으리라

 

소리는 이미 돌 속에 단단히 스며들었는데

소리는 몸을 깨뜨리고 찢고 電氣처럼 우는데

어쩌면 그것은 세상 밖에서 홀연 나타났던 것인데

어쩌면 그것은 원래 몸속에서 들려오던 것이었는데

 

千年의 돌사람은 아직도

어딘가로 숨으려는 듯 웅크리고 있다

 

천지에 가득한 울음 들어오지 말라는 듯

그 울음 절대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듯

결사적으로 두 귀를 틀어막고 있다

소리 내지 않고, 죽지도 않고

- 소리 지옥전문

 

여러 시편들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흩뿌려 놓으며 죽음을 맞닥뜨리고 있는 그의 태도는 의외로 담담했다. 피눈물이 나도록 울어버린 다거나, 목이 쉬도록 소리쳐 비명을 지른다거나, 세상을 향해 치열한 욕지거리 한 번 날려버린다거나 하는 식의 저항 따위는 없었다. 시를 통해서 담담히 죽음에 대해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삶에 드리운 그늘을 인정하고, 초연하게 지내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소리 지옥이란 시에서 참혹할 만큼 솔직한 시어로 드러난다. 결코 담담하지 않았으며, 찢기고 찢겨 저항할 힘조차 내면으로 묻어버린 잔인한 그의 내상(內相)마야 인형이란 사물을 통해 표출된다. “마른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웅크려 울고 있마야 인형은 지독히도 처절한 모습이다. 비록 웅크린 몸이지만 들어서는 안 될 소리가 파고들어온다, 어쩌랴/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던 자세가 몸부림치다 굳어져버렸기에, 웅크리면 웅크릴수록 보는 이로 하여금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비록 세상에게는 천둥 벼락도 불안 우울도 없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이 될 수 있겠지만, 한 개인에게는 참혹하리만큼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저 형상에 처연하게 새겨져 있다.

 

 

그는 고통의 웅크림 속에서 혼자 나지막하게 하소연한다. “살았을 적에 잘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잘한다는 것은 죽은 자를 영원이 잊지 못한다는 것”, “살아서 잘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호두나무 아래의 관찰)와 같은 말들을 되풀이하고 또 반복한다. 누구나 삶에서 한번 쯤 들었을 법 한 말들을 되뇌며 푸념한다. 끝내 표출되지 못하고 내면으로 묻혀버릴, 그래서 더 깊이 파고 들어와 박히고 마는 언어들을 곱씹는다.

이처럼 끝내 죽음으로 말미암은 슬픔을 표출하지 않는 고집, 묻고 묻어서 애써 태연을 자처하겠다는 그의 고집은 천지에 가득한 울음 들어오지 말라는 듯/그 울음 절대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듯/결사적으로 두 귀를 틀어막고 있다/소리 내지 않고, 죽지도 않고소리 지옥마지막 연을 통해 참혹함을 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연민이란 감정을 북돋는다. 참혹하게 찌푸려진 인상은 안쓰러운 감정과 더해져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고집은 계속된다. 결코 슬픔을, 울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내면에 묻고 또 묻으면서, 계속해서 삶에 드리운 그늘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수행을 이어나간다. 그는 얕지만 짙은 그늘을 답보踏步 하는 고행을 멈추지 않는다.

 

번개에 의해 나타난,/젖은 채로 타고 있는 나무처럼/그는 어제의 그 자리에 앉아있다 (중략) 나는 어제까지 그를 지나갔다/나는 작년까지 그를 지나갔다//그러므로 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다가갈 수도 지워 없앨 수도 없는 사람을/나는 영원히 지나갔다/한순간도 지나가지 못했다

- 생각하지 않는 사람부분

 

순대국집 앞 대로에는/죽은 개 한 마리가 엎드려/천천히, 한 일주일째/건너가고 있다 (중략) 두 블록쯤 앞은 지난여름에 사람이 치여 죽은 곳이다/그는 엉망으로 취해/중앙 분리선 위를,/그러니까 생의 한가운데를 갈지자로 걸어갔다 (중략) 횡단보도 반토막만 한/개의 길/ 두 블록이 될까 말까 한/사람의 길/아무도 없는 밤이면 슬며시 일어나/다시 걸어가는 길

- 부분

 

눈꽃열차가 復活하듯 굴을 빠져나갔다 (중략) , 죽인다/사람들이 창밖을 향해/이구동성으로 외마디를 내질렀다//죽음은 투명한 흰빛인데도/사람들은 단숨에 알아본다/열차도, 펄쩍대는 싱싱한 죽음들을 잘 알아 모신다//뛰어내릴 듯 차창에 매달린,/죽여줘도 신난다는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눈꽃열차는 다시 굴속으로 들어간다

- 눈꽃열차부분

 

그 아주머니는 다가왔다/후줄근한 터미널이었다/그녀는 천국발 버스에서 방금 내린 사람처럼/천국 얘기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중략) 예수와 구원과 천국의 황홀한 인과관계를/놀랄 만큼 정확히 되풀이하며 (중략) 끝내 홀로 남을 저 가난한 목자가/천국막차를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 천국부분

 

제시된 시 생각하지 않는 사람, , 눈꽃열차, 천국는 다양한 삶에서 그가 어떻게 죽음을 포착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가 혼잡스럽게 제시되면서 어제의 그 자리에앉아있었을 법한 를 지나갔는지, 지나가지 않았는지 불명확하게 제시하여 의 생명성에 의문을 남기고 있으며, 에는 도로 위에서 마주칠 수 있는 사소하지만 빈번한 죽음이 그려져 있다. 눈꽃열차천국또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서 죽음을 연상하는 화자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슬프고 어지러운 그림자란 시에서도 산낙지 접시에서 기어 나온 살점들이 탁자 위를/필사적으로 달아난다/온몸으로 눌어붙으면서도란 말로 운을 떼면서 결코 삶과 갈라설 수 없는 그늘을 집어낸다.

 

 

그는 왜 이토록 질기게 삶에서 죽음을 직시하고 있는 걸까. “마야 인형처럼 고통스러운 내면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그늘이 드리운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답답할 정도다. 휴식에 등장하는 의자”, “소파”, “침대에서 의자는 의자에 앉아서”, “소파는 소파에 기대어”, “침대는 침대에 누워서휴식을 취할 수도 있을 텐데, 그는 왜 그렇게 하지 않고 지독히도 죽음을 스토킹한다. 이토록 죽음에 집착하는 태도는 그늘과 사귀다시집 전반에 분포해 있어, 휴식에 등장하는 앉아서”, “기대어”, “누워서등의 서술어까지도 극단적 휴식, 죽음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죽음의 존재를 삶이란 곳에서 끊임없이 동행하고 있는 건 어쩌면 그가 이미 삶과 죽음이 더 이상 불가분의 관계로 귀결할 수 없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이미 삶 전반에 그늘이란 형상으로 드리운 죽음은 낯선 존재가 아닌 것을 말이다.소리 지옥에 기술돼 있는 것처럼 죽음이란 것은 어쩌면 그것은 세상 밖에서 홀연 나타났던 것인데/어쩌면 그것은 원래 몸속에서 들려오던 것이었는데와 같은 성격을 지님으로써, 내면 혹은 외면에 어떤 식으로든 존재했다. 그러한 것들이 떵떵거리는에 제시된 아버지의 죽음을 시작으로 서서히 그늘처럼 드리우기 시작하더니, 이내 시의 제목처럼 그늘과 사귀다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성립된 거다.

 

새벽 두시, 티브이를 켠다

그는 이곳을 버렸다

한결 넓어진 실내에서

창백한 여분의 공간을 위해 그가

알아서 떠나준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깨끗이 지웠는데도 나타나는 것들,

죽음에는 빈틈이 많다

- 거울 얼굴부분

 

사소한 일상에서도 죽음이란 존재는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다. ‘이제는 잊었다.’, ‘이제는 잊었구나.’ 라고 여기지만, 아니다. 떠나보내야 하지만 떠나보낼 수 없고, 잡고 싶지만 잡을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시인은 이러한 감정을 깨끗이 지웠는데도 나타나는 것들,/죽음에는 빈틈이 많다는 말로 표현한다. “빈틈사이사이에서 죽음이란 이미지를 엿볼 수밖에 없는 그여서 이러한 표현에 더 시린 감정이 맺힌다.

 

거울 얼굴이란 시에선 죽음의 이미지가 더욱 사실적이다. 현세와 다른 공간에 있어 직시하기 힘든 존재로써 그려지는 죽음의 이미지가 아니라, “경로우대증도 스쿠터도 없이/그는 막막한 빈틈을 건너고 있으리라처럼 현세적 모습으로 탈바꿈한 죽음의 형상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은 뼛속으로/모래 속으로 스며드리라는 시어로 그런 죽음이 삶에, 현세에 더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모습을 그려낸다. 이토록 현실적이어서 더 참혹한 죽음을 그는 계속해서 감내한다. 마치 그늘이란 애인을 옆에 끼고 새벽 두시, 티브이를감상하는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가 이렇게 끊임없이 그늘과 뒤엉켜 살아가는 근본적인 이유는 에 기재돼 있다. 다음은 에 실린 자조적인 자아성찰의 한 대목.

 

는 늦은 것이다

하객들 두루 도착한 후에

문 닫고 들어와 조용히

뒷전에 앉는 사람처럼

 

는 아주 먼 것이다

송고를 하고

기계를 끄고

술 한 잔 앞에 두면

, 빈손이다

 

(중략)

 

그렇게 나는 멀리

나갔다 왔다

멀리 들어갔다 나왔다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데

멈추지 못하는 길이 있었던 거다

불끈거리며 몸속을 달리는 정맥혈관처럼

- 부분

 

에서 그는 시를 쓰며 살아가는 생활, 시에 대한 감상을 1연과 2연에 나직이 서술한다. “문 닫고 들어와 조용히/뒷전에 앉는 사람처럼”, “술 한 잔 앞에 두면/, 빈손이다란 시어를 보고 있자면, 애잔한 마음이 더러 인다. 하지만 그 애잔한 마음은 시의 후반부에 갈수록 시인이란 직업에 대한 숭고한 마음가짐 앞에서 겸손해진다. 스스로에 대해 잔인하게 솔직해져버린 그의 고백에, 넋을 잃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멀리/나갔다 왔다/멀리 들어갔다 나왔다//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데/멈추지 못하는 길이 있었던 거다란 대목에는 그가 시를, 죽음을 나아가 그늘을 끼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직접적으로 제시돼있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햇볕에 그냥 혼자 버려두어/스스로 쉬게 하라”(휴식)는 쉼을 갖기엔 너무 멀리/나갔다온 것이다.

 

시를 쓰며 살아가는 인생은 그늘과 사귀며 살아가야하는 숙명과도 같다. 그렇기에 스스로 인정하며 고집대로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다. 비록 뒷전에 앉는 사람이 되더라도, 고작 빈잔만 남더라도 불끈거리며 몸속을 달리는 정맥혈관처럼끈질긴 삶을 살아가야 한다. “백주 대낮의 백주 대낮 같은/번뜩이는 그늘짙은 삶을 말이다.

 

고된 삶이기에, 쉽지 않은 생이기에 그늘과 사귀다란 시집을 내며 읊조린 시인의 말까지 한편의 시가 돼 그의 삶을 그린다. 아침엔 찌는 듯한 태양에, 밤에는 정신없는 네온불빛에 한 시도 어두워질 시간을 허락지 않는 현대의 오늘이지만, 하루라도 죽음이란 존재에서 멀어지려 웰빙(well-being)이니 다이어트(diet)니 시끄러운 한국이지만, 그럼에도 그늘을 부둥켜안고 시를 써내려간 시인 이영광의 그늘과 사귀다란 시집이다. 명암의 사이에서 삶과 죽음 사이의 괴리감, 빈틈에서 수없이 많은 죽음들을 마주했을 그에게 숭고의 박수를 보낸다.

 

그가 시와 더불어 苦行하게 된 것이/행복하듯, 우리가 그와 더불어 苦行하게 된 것이/행복하다. 비록 이 모든 게 그늘이 드리워질 속수요, 무책이 될지라도.

 

시인의 말

 

이 어룽어룽하고 쓰린 세상에

멍멍한 사람으로 와서

다름 아닌 시와 더불어 苦行하게 된 것이

행복하다

 

번개와 함께 나타난 골자기의 나무들이

젖은 채로 타고 있듯이,

閃光一瞬일 뿐이지만

 

속수요,

무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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