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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천일은행, 그 역사의 발자취 속으로
시중은행들의 몸집 줄이기가 본격화됐다. 최근 스마트폰 뱅킹, 비대면 계좌 개설, ICT와 핀테크 등 금융서비스 분야 내 변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은행들의 점포 수가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은행 창구는 물론 영업점까지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았다. 이에 기자는 우리나라 은행의 시초와 역사를 환기하고자 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사 지하에 있는 은행사발물관을 찾았다.
■ 조선시대 전통금융에서 근·현대 은행의 초석이 놓이기까지
은행역사박물관으로 첫발을 내딛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조선시대 후기 장터의 모습이다. 농본사회를 근간으로 세워진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중·후기에 이르러서야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 장터가 들어서는 등 경제활동이 활발히 이뤄졌으며 상평통보(常平通寶)란 주화도 폭넓게 유통됐다. 박물관 한 켠에 전시된 상평통보 엽전꾸러미를 통해 당시 백성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인들 사이에서는 어음 같은 신용화폐도 사용됐다. 중앙지역과 지방 간 자금 유통을 처리한 ‘외획’ 제도, 개성상인들 사이에서 주로 행해진 단기자금 유통법 등 다양한 금융제도도 존재했다. 즉, 은행이란 금융전문기관의 모습만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지 은행 본연의 기능과 역할은 이미 출현·성행하고 있었다.
은행이란 기관이 조선시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건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다. 당시 개항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조선은 일본을 비롯한 외국계 은행들이 한반도에 우후죽순 들어서는 걸 막지 못했다.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당시 상인들의 얘기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본 상인들로 말미암아 조선 상인들의 피해가 말이 아니라는 둥, 일본 은행이 조선에서 돈을 싹쓸이해간다는 둥, 한숨 섞인 푸념들이 실감나게 전해졌다.
일본과 서양 열강들이 자국의 은행을 기반으로 조선의 경제침략을 본격화하는 걸 깨달은 조선의 금융선각자들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민족은행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주적 민족은행의 설립을 추진했다. 조선은행(1896년), 한성은행(1897년), 대한은행(1898년) 등이 설립됐으나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
■ 우리나라 최초 민족자본 설립은행, 대한천일은행
이에 서울과 개성의 유력한 상인들은 고종황제의 지원으로 1899년 1월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을 설립했다. 민관합작으로 세워진 대한천일은행은 일반은행의 역할과 함께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했다.
이기정 우리금융그룹 학예연구사는 "고종황제가 대한천일은행 설립 당시 3만 원가량의 황실자금을 출연했다."며 "적어보일 수 있겠지만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30억 원가량 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고 설명했다.
민족상권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은 뫼 아래 하늘 아래 첫 번째 은행이란 의미를 지닌다. ‘대한’은 광무 황제의 대한제국 이름에서 따왔다. 1901년 영친왕을 은행장으로 추대하고 "조선사람 이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팔 수 없다"고 명시하는 등 민족은행으로서의 입지를 견고히 했다. 일제의 금융 침탈에 맞서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대한천일은행의 활동을 살펴보다 보면 아래 비치된 대한천일은행 창립청원 및 인가서를 볼 수 있다. 은행사발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사료로서 현재 국가기록원 지정기록물 제11호로 등록돼 있다. 이 밖에도 2009년 서울특별시는 우리은행 소장 유물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하여 ‘대한천일은행 창립관련 문서 및 회계문서’ 19건 75점을 유형문화재 제279호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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