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모처럼 애니메이션 영화를 봤어. 그것도 꽤나 순수한 걸로 말이야. 바로 어린왕자.

누구나 다 알다시피 생택쥐 페리의 어린왕자 이야기를 모티브로 또 배경으로 해 제작된 영화였어.

사막 한 가운데서 비행기가 고장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한 꼬맹이가 와서 말하지.

"양 한 마리를 그려줘. 너무 아프지도, 늙지도 않은 걸로 말이야. 단, 염소는 안돼."

이런 내용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다들 알잖아?


영화에서 특히 좋았던 건 이 이야기가 우리들이 일상 생활에서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재(再)탄생 한단 거였어. 괜찮은 시도라고 봐.

그래서인지 책에서 등장했던 어린왕자와 그를 보고 기록한 비행사의 이야기가 주(主)가 아니야. 대신 아주 평범하고 어린 여자애

좋은 학교에 들어가려 발버둥치고, 성적과 스펙쌓기에 열을 올리는 21세기 도시적 삶을 향유하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꼬맹이가 주인공이야.

그녀는 옆집 사는 괴짜 비행사 할아버지 덕분에 어린왕자를 알게 되고 서서히 삶이 변화하기 시작하지. 모든 것들이 시간이란 테두리 안에서 제약된

약속이나 한 듯 정해지고 반복된 생활들에 금이 가고, 하루하루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계획표보단 기분 내키는 대로 할아버지와 놀기 시작해.


또 하나 재밌었던 건 어린왕자의 등장. 누구나 어린왕자,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을 거야. 순수하고 앳되고, 귀여우면서 엉뚱한. 노란 곱승머리에 초록색 옷의 신사.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의 첫 등장은 달랐어. 먼저 '어린'이란 수식어를 떼버려 어른이 된 왕자였고, 순수하고 앳된 티는 찾아볼 수 없는 노동자에 불과했지.

회사 옥상을 대걸레질하고, 환풍기 구석구석을 닦고, 유리에 물걸레질을 하는 그런 청소부 중 한 명이었어. 말로는 계속 "필수적인(Essential)"을 되뇌였고.


필수적인(Essential)과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What is important is what is invisible)란 두 문구가 이 영화의 핵심이었어. 왕자가 중얼거리던

필수적인(Essential)은 어른들 사회를 기준으로 측정된 것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상할 수밖에 없지. 무엇이 과연 필수적인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어. 장미꽃이 사라졌을 때 어린왕자가, 또 어린왕자가 사라진 부분을 이야기 할 때의 비행사가 말했던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는

묘하게 잔향이 남는 문구랄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금새 또 멀어져가는 뭔가 같았어.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허연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부대나 도득들 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영화가 마음에 들어 글 하나를 남기려 머리를 굴리는 중 떠오른 시야. 처음 이 시를 대했을 때 아마 퍽이나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

읽는 것으로 모자랐는지 필사를 하기도 했었으니 말이야. 어른과 아이에 대해, 또 내가 되고자 하는 어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어.

모두 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어린왕자' 덕분이지. 이런 영화가 있어 다행이야. 정말로.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