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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보사 기자로 일하던 시절, 난 딱히 아무런 용무도 없이 신문사를 드나들곤 했었다. 대개 아무도 없이 공간만 휑뎅그렁하니 남겨진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곳에 감돌고 있는 종이 냄새가 좋았다. 습기를 머금듯 세월을 머금은 종이 냄새와 신문, 그 특유의 향. 빗소리가 들릴 때면 젖은 거리에서 풍기는 비내음을 맡으려 창문을 열 듯, 세월을 머금은 종이 향이 그리울 때면 아무런 까닭도 없이 발걸음을 신문사로 옮겼었다.
조그만 경제지에 입사한 첫날. 사무실을 맞닥뜨렸는데, 첫인상이 결코 달갑지 않았다. 텅 빈 사무실에 주인 잃은 채 널려있는 의자들이 눈에 거슬렸다. 정돈되지 못한 전선들이 잡초마냥 이곳저곳에 솟아나 있었다. "광화문에서 힘찬 발돋움을 준비한다!"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무채색을 띈 사무실이었다. 빈 공간 언저리로 시선을 던져둔 채 생각했다. 활황기란 한 철을 이미 지나버린 사무실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미처 차지 못한 서랍장과 수납공간이 자꾸만 떠올라, 결국 면접 도중에 “책이 없어 다소 실망했다.”란 말을 내뱉고 말았다. 사무실을 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회사의 사정을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야 깨달았다. ‘아차, 그랬었지….’
첫 출근 아침. 당일 발간된 신문에서 오탈자를 찾아 교정하는 작업이 한창이던 때, 익숙한 향기에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인지 모르게 과거 한때 익숙했었던 향이 콧잔등을 간질였다. 사무실을 훑었다. 잡초 같은 전선, 텅 빈 의자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다만 여느 때와 달리 사무실을 분주히 오가며 일처리에 바쁜 직원과 기자 그리고 부장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들린 종이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냄새의 범인은 그곳에 있었다. 냄새는 내 기억을 과거로 이끌었다. 정확히 오년 전 내가 몸담았던 학보사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정돈되지 못한 전선과 마감 날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비어있었던 주인 잃은 의자들. 게다가 꼭 닮아있는 부장과 기자들의 좌석 구도까지. 눈앞에 펼쳐진 경제지 사무실 풍경에 과거 학보사 시절 기억이 오버랩(overlap)됐다.
나는 다시 그때로 되돌아온 것일까. 숨을 크게 들이쉬어 한 동안 음미하지 못했던 종이향을 듬뿍 들이마셨다. 내 글이 새겨진 이 종이도 언젠가 세월을 머금어 이런 잔향을 남기는 날이 올는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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