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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란 옷을 입혀 감상한 월광한

 

월광한(月光恨). 풀어쓰자면 달빛에 깃든 한정도가 될 것이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뜨겁고 화려한 태양을 일컬어 양기(陽氣)의 상징이라 여겼고 서늘하고 은은한 달의 기운을 음기(陰氣)의 상징으로 보았다. 자연히 태양은 남성성이 깃든 자연물로, 달은 여성성을 내포한 자연물로 분류됐다. 이러한 추측을 기반으로 소설의 제목을 다시금 풀어쓰자면 달빛을 닮은 여성에 깃든 한정도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이 비약이 아닌 이유는 해당 소설 곳곳에서 제주도 아녀자들의 시름과 한을 나타내는 소재들과 서술이 여럿 등장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앞서 다룬 작품 중에서도 달을 제목으로 내건 일본 소설 한 편을 읽은 바 있기 때문이다. 사키야마 다미의 달은, 아니다란 작품이 그것인데, 여성의 고통을 다루고 있단 점에서 월광한과 일맥상통할 뿐만 아니라 제목을 통해 달에 부정적 기운을 투영한 것까지 닮았다.


소설 김정한의 월광한은 제목에 비친 이 같은 기운을 반영이라도 하듯, 대체로 음의 기운을 띈다. 등장인물 수에 있어서 남성보다 여성이 많고 남성성이 결여된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단 점과 더불어 화자가 주목하고 있는 대상 또한 해녀란 점이 그러하다. 하지만 마냥 음기만 가득하다고도 말할 순 없는 게 음기 속의 양기가 이 작품의 묘미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한 남성이 해녀들을 마주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소설이 출판된 시기가 1940년대란 점과 소설에 등장하는 상관의 명령”, “하급 관리란 키워드를 통해 남성은 조선총독부 소속 공무원 정도로 짐작 가능하다. 그는 출장을 가던 중 은순이라 불리는 젊은 해녀에게 반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남성들이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여성적 기질에 혹한 게 아니라 그녀의 내면 혹은 외면에 깃들어있는 남성적 뭔가에 반응했단 것이다.

 

그네의 얼굴에서 견딜 수 없는 애정을 느끼고, 그 탐탁하고도 억센 손에서 조물주가 그네에게 맡겨놓은 아리따움을 어떠한 오입쟁이의 아리수에도 짓밟히지 않을 듯한 굳센 의지와 감정을 발견하게 된 나는 그럴수록 더욱 더 그 남국의 여인에게 은근히 혼을 잃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계속해서 그녀를 찾게 되고, 이윽고 박군이란 친구를 통해 해녀 무리의 술상을 받는 자리까지 옮겨간다. 이 과정에서 은순이라 불리는 해녀를 비롯해 다른 해녀들의 남성적 색체가 드러나는데, “겉가량보다는 꽤 걸식걸식한 여자 같다.”, “여태 주인 방에서 게걸거리던 해녀 세 사람도 숫기 좋게 척척 들어와 앉았다.”란 문장들과 은순이가 늙은 노파에게 대드는 장면에서 그러한 점들이 엿보인다.

무리가 아니라면 이들의 이와 같은 남성성의 기원을 제주도 세화리 해녀 투쟁이라 명명되는 역사적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화리 해녀 항일투쟁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19321월 제주도 해녀들이 일본인들의 잔학한 수탈행위와 인권침해를 견디다 못해 일으킨 생존 및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이후 주인공은 은순이에게 첫눈에 반해 넋을 놓아버릴 정도의 경험을 두 차례 정도 더 하게 되는데, 우선 술자리에서 늙정이가 <이여도>란 노래로 선창을 하고 은순이가 이어서 춤을 추는 대목이다. 여리여리한 몸짓이 그야말로 <이여도> 간 영혼을 부추기기나 하는 듯이 흥겹고도 예쁘다. 나는 꿈속에서 휑한 정신으로 정열에 사무친 그들의 노래와 춤에 싫도록 취해 버렸다.”

문장에서 영혼이란 단어를 통해 알 수 있듯, 이여도는 일반 사람이 가는 섬이 아니다. 죽어서야 갈 수 있는, 영혼들만이 갈 수 있는 섬이다. 이 부분이 아마 소설의 제목에 내포된 월광한이란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낸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후 주인공과 인순이가 이여도 혹은 뻐꾸기섬을 향하는 도중 부르는 뱃노래도 제주도민들의 시름과 사무친 한이 담긴 노래란 점에서 <이여도>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여도에 대한 보충 설명을 위해 지식백과의 내용을 아래에 그대로 덧붙이도록 하겠다.

 

제주 사람들, 특히 제주 여인에게 이어도는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나 남편이 깃든 곳, 자신들도 결국 그들을 따라 떠나게 될 곳으로 굳게 믿는 환상의 섬이요, 피안의 섬이다.

- NAVER 지식백과 “KISTI의 과학향기 칼럼

 

후반부에 주인공이 가고자 하는 섬 뻐꾸기 섬도 소설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키워드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한데, 이유는 이것이 소설 전반부에서도 주인공의 입을 통해 읊조려졌기 때문이다. 영국 시인 에즈워스의 뻐꾸기에게로 란 시는 뻐꾸기의 지저귀는 소리를 통해 나이든 화자에게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 “황금빛 옛 시절이라 대변되는 기억을 환기시키는 내용이다. 즉 젊은 시절, 과거에 대한 동경을 다룬 작품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시를 계속해서 읊조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지금이 아닌 과거로, 한 시절 좋았던 그때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내면 깊이 지닌 인물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과거란 해녀들에게는 남편이 이여도란 섬으로 가기 전, 바다에 남편을 잃기 전, 부부로서 온전했던 그 시절이 될 것이다. 작품을 확대해석해 역사적 맥락을 입혀 본다면 제주도 세화리 해녀 투쟁이 일어나기 전, 주인공이 조선총독부 아래서 일하기 전, 즉 대한민국의 주권이 살아있던 그때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도 해석될 수 있다.

 

끝으로 소설과 관련한 배경 지식을 찾아보던 중 작가 김정한이 스스로 김정한소설전집을 내며 월광한이란 작품을 수록하지 않았단 점을 알게 됐다. 작품에서 감지되는 낭만적 허무주의적 색체 때문에 해당 작품이 누락됐을 것이란 말도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게 과연 정답일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단순 작품만 놓고 봤을 때는 분명 남녀 간 치정과 이여도에 대한 해녀들의 한만을 다루고 있는, 다소 현실을 외면한 듯한 작품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 연골고리들을 대입해 읽어보면 충분히 시대 현실을 반영했다고 볼 여지가 있는 부분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하다못해 윤동주처럼 소극적 저항으로 읽어낼 만한 부분들도 적지 않다. 따라서 해당 작품과 작가에 대한 좀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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